Speaker A
안녕하세요. 저는 예쁜 딸 하나 키우고 있는 30대 돌싱맘이랍니다. 이혼이란 저와는 상관없는 남들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제게도 이런 고난이 찾아오더군요. 그때는 참 힘들었었지만 1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제법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남편이 아이를 만나러 오면 웃으며 안부를 물을 수 있을 만큼 괜찮아졌어요. 아니, 어쩌면 제가 누리고 있는 이 잔잔하고도 소소한 일상이 행복일 수도 있겠네요. 오늘은 오랜만에 부모님과 아이와 함께 속초에 여행을 왔어요.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모두들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고 기절한 듯이 숙면한 딸 헤아를 바라보다 득 제 얘기를 들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혼의 끔찍했던 상처에서 이제는 완전히 벗어났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글을 남겨볼까 해요.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화목한 가정의 외동딸로 자랐습니다. 아빠는 막노동을 하셨고 엄마는 빌딩 청소부 일을 하셨어요.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새 식구가 한 방에서 잠을 자야 할 정도로 가난했고 좁은 비탈길에 있는 방 두 개짜리 낡은 빌라로 이사 가던 날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난생 처음 제 방을 가져본 날이었으나 짐들이 꽉 들어찬 창고에 가까운 작은 방이었지만 혼자 조용한 곳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기뻤죠. 없는 형편에 학원엔 다닐 수 없었지만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남들 다 다니는 학원에 보내 주지 못해서 부모님이 많이 미안해 하셨거든요. 특히 엄마는 제가 굉장히 머리가 좋다고 믿고 계셨어요. 그래서 똑똑한 딸 뒷바라지 못해 준다는 생각에 엄청 가슴 아파 하셨죠. 나는 혼자 공부해도 1등할 수 있어. 왜냐하면 엄마 닮아 똑똑하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전 머리가 좋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다만 어린 시절 철이 좀 일찍 들어서 엄마 아빠 고생하는 게 너무 안쓰러웠지. 그래서 이 악물고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뿐입니다. 그런 노력이 통했는지 중학교 때까지는 그런대로 제법 공부를 잘했어요. 반에서 3등 안에 꼭 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도 아닌데 아마도 그게 제 한계였던 것 같아요. 괜찮아 괜찮아 이것도 엄청나게 잘한 거야. 정민이는 열심히 노력하니까 금방 다시 따라잡을 수 있어. 아빠는 제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받아올 때마다 이런 식으로 격려를 해 주셨어요. 하지만 저는 왜 성적이 자꾸만 떨어지는 걸까? 이러다 좋은 대학도 못 가고 돈 많이 버는 좋은 직장도 가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괴로웠죠. 아무리 코피 터지게 공부해도 3등까지 성적은 계속 떨어지기만 했어요. 저는 간신히 인서울 대학에 국어국문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답니다. 그것만으로도 부모님은 크게 기뻐해 주셨어요. 지방대에 가면 자취를 해야 하니 돈이 더 드는데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학교에 갔으니 효녀라 그랬어요. 대학에 가서도 저는 굉장히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2학년 때 아빠가 크게 다치시는 바람에 병원비도 많이 나온 데다 일까지 몇 년 쉬셔야 했거든요. 카페, 패스트푸드점 등등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습니다. 비록 명문대는 가지 못했지만 학점 관리도 잘하고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격증도 많이 따서 좋은 데 취업하고 싶다던 꿈은 또 그렇게 날아갔습니다. 그 예쁠 나이에 연애 한번 못 해보고 죽도록 일만 했어요. 다행히 학점은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유지했지만 그게 다였죠. 집에서 용돈 타 가며 도서관에서 공부만 한 친구들의 취업 준비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죠. 졸업을 한 후 몇 번의 고백 끝에 드디어 취업에 성공을 했어요. 이름 없는 중소기업이긴 했지만 연봉도 나쁘지 않았고 복지가 꽤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합격 메일을 받은 날 저녁 우리 새 식구가 삼겹살을 하며 얼마나 행복했는지요. 아빠는 평소에 잘하지도 못하는 소주를 한 병이나 비우고 "고생했다 우리 정민이, 아빠가 우리 딸 정말 자랑스러워하는 거 알지?" 아이, 뭘 이 정도 갖고 아빠 아직 자랑스러워 하긴 아직 일러. 혹시 내 꿈이 뭔지 알아? 뭔데?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한테 본 집 사 주는 거, 그것도 신축 아파트로. 이야, 말만 들어도 벌써 부자 된 것 같은데. 그리고 엄마 아빠 아직 비행기 한 번도 못 타 봤잖아. 까지 꺼. 내가 1년에 한 번씩 해외 여행 보내 준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제 말에 아빠는 껄껄 소리 내며 호탕하게 웃으셨어요. 여보, 아이 들었어? 우리 딸 잘 둔 덕분에 말년의 팔자가 확 피게 생겼어. 아, 이거 임금님이 안 부럽겠다. 이에요. 당신은 나한테 평생 절해야 돼. 이렇게 이쁘고 똑똑한 딸 키우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요? 오랜만에 집안 가득 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물론 아파트를 사고 밥 먹듯이 비행기를 태워 주는 등 이런 허세 섞인 말들이 실현될 리는 없다는 건 우리 세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면 적어도 남들처럼은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는 희망으로 가득 찼어요. 그리고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던 게요. 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연애 한번 해본 적 없는 목소리였어요. 앞으로도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할 계획이 없었고요. 결혼을 하지 않고 계속 엄마 아빠와 함께 산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아파트를 사고 함께 해외 여행을 다닐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먼 미래를 꿈꿨습니다. 이런 원대한 꿈을 가진 저였기에 회사 생활이 힘들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짜잘한 알바로 푼 돈만 만져보다가 난생 처음 월급이라는 걸 받으니 아, 얼마나 기쁘던지요. 이제 엄마 아빠랑 맛있는 것도 자주 먹으러 다니고 새 옷도 한 번씩 사 드리려고 큰맘 먹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빠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이, 적금, 연금, 청약, 펀드로 나눠서 넣자. 월급의 70%만 떼서. 보너스 나오는 달도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쪼들리지 않을 거야. 아, 아빠 나도 펑펑 쓰겠다는 건 절대 아닌데 그래도 70%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아이, 다 쓰고 남는 돈으로 저축하면 언제 모아? 엄마 아빠가 능력이 없으니 너 시집 가려면 허리띠 바짝 졸라매야 돼. 나 결혼 안 한다고. 엄마 아빠랑 평생 같이 살 거라니까. 원래 시집 안 간다고 하는 애들이 제일 빨리 가더라. 아빠도 참. 난 아니라니까. 진짜 안 가. 그때 아빠가 하신 말씀이 씨가 된 걸까요? 저는 살도 되기 전에 이른 결혼을 하게 됩니다. 네, 예상하신 대로 혼전 임신이었어요. 전남편은 거래처 사람이었어요. 우리가 갑이고 남편 회사 측기 의인 협력 프로젝트 진행 중에 만났습니다. 남편은 석 달 동안 거의 우리 회사에 출근하다시피 했고 제가 몸담고 있는 부서에서 함께 일했습니다. 야근하며 밤을 세는 경우가 잦았어요. 좀 뻣뻣하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우리 회사 분위기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눈에도 사람이 굉장히 털털해 보였고 겪어 보니 실제로도 편안한 성격이었어요. 허례허식이 전혀 없고 잘난 척도 없고 할 말을 속에 감춰 놓는 법도 없었어요. 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말만 늘어놓는 사람들 속에서 살다가 그런 남편을 봤을 땐 신선하기까지 했어요. 다른 여직원들은 그 사람이 할 말 못할 말을 안 가리고 다 해서 매너가 없다고 표현하더라고요.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제겐 말을 가리지 않는 그런 점이 더 편하게 느껴졌고 매력이라고도 여겨졌어요. 아무래도 사람들이 하는 말이란 게 제대로 쉬었었는데 퇴근을 하는 날이면 남편과 저는 회사 근처 우동 가게에 들러 우동을 한 그릇씩 먹고 헤어지는 게 루틴이 됐어요. 그렇게 석 달이 지나고 남편이 자신의 회사로 복귀하게 되는 날 사귀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 사람과는 다시는 볼 일이 없는 거거든요. 함께 일하며 정이 많이 든 사람과 영영 못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건 좀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연애는 눈곱만치도 관심 없었던 제가 그의 사귀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습니다. 전남편과의 연애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연인 사이라기보다 아주 막한 대학 선후배와 같이 편한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퇴근 후나 주말에 만나 산책하거나 백반집에서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을 먹고 헤어지곤 했어요.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데이트냐 말하겠지만 남편은 워낙 털털한 사람이었고 저도 그게 더 좋았거든요. 앞서 말했듯이 월급의 대부분을 아빠가 적금과 펀드로 묶어 놓는 바람에 저는 쓸 수 있는 돈이 많지 않았어요. 아마 돈이 많이 드는 데이트를 해야 했다면 전 그게 부담스러워 금방 도망갔을 수도 있어요. 혼전 임신으로 헤아를 갖고 나서 부랴부랴 결혼을 했습니다. 네, 아빠의 말씀이 딱 들어맞았죠. 아빠가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주셨기 때문에 그걸로 부족하게나마 결혼 비용을 충당할 수가 있었어요. 엄마 아빠는 기뻐하지만 저는 사실 많이 속상했어요. 장인이 돼 부모님께 이렇다 할 도움도 못 드리고 해외 여행 한 번도 못 보내 드리고 이렇게 빨리 결혼을 하게 돼 버렸으니까요. 그런 제 마음을 알아채는지 엄마는 계속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아직 젊고 둘 다 일할 수 있는데 무슨 걱정이니? 네가 가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게 제일 큰 효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헤아를 낳고 나서 짧은 육아 휴직이 끝나고 나니 제가 직장으로 복귀하기 위해선 아이를 봐 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혼자 몸이신 시어머니는 경상도에 살고 계시고 할 수 없이 우리 엄마가 빌딩 청소 일을 그만두셔야 했습니다. 남편도 저도 워낙 가진 게 없는 상황에 부랴부랴 살림부터 낸 터였고 전세자금 대출이며 자동차 할부금, 아기 양육비까지 통장에 돈이 쌓일 틈이 없었어요. 직장을 관두고 아기를 봐주는 엄마에게 큰 돈을 드릴 형편이 못 됐어요. 사실 애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빌딩 청소보다 아기 보는 일이 훨씬 더 힘듭니다. 오죽하면 애벌레 반 멜 물어보면 백의 백 바틀 맨다는 말이 있겠어요. 갑이 다 된 엄마가 못난 딸 때문에 황혼 육아를 하시는데 보수를 넉넉히 드리지도 못하니 마음이 너무 아프더군요. 그래서 내가 덜 먹고 덜 쓰더라도 엄마한테 조금이나마 더 챙겨 드리기 위해 가은 애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의 불만이 터지더라고요. 아, 장모님께 이렇게나 많이 드려야 돼? 이게 많은 거라고? 엄마 받으시던 월급 생각해 봐. 우리가 훨씬 적게 드리는 거거든. 아, 밖에서 받는 월급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아, 해안은 장모님 손녀야. 아, 노인들이 손주 봐주는 건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으로 하는 거지. 아, 그냥 용돈 정도 드리는 게 맞다고 봐. 나는. 남편은 이런 귀 막힌 소리를 늘어놨습니다. 희생이라 해야 할 우리 딸이지 엄마 딸인가요? 자기 자식은 부모가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막말로 엄마가 아기를 안 봐주시겠다고 하면 베이비시터라도 써야 할 형편인데 그럼 돈이 얼마나 심하게 깨지는데요? 게다가 남의 손에 우리 아기 맡기는 것도 불안한 일이고요. 엄마가 이렇게 적은 돈을 받으시고 사랑하는 헤아를 길러 주시는데 감사한 마음은 둘째치고 보수를 더 줄이라고 말하는 남편이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시어머니가 아기를 봐주는 상황이라도 그 말을 했을까요? 남편이 우리 엄마의 노구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아 무척이나 속상하더군요. 저는 그날 남편과 대판 싸우고 나서야 엄마의 보수를 현상 유지시킬 수 있었어요. 사실 우리 회사의 거래처 직원이던 남편의 연봉은 제 것에 많이 못 미치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더 많이 버니 그나마 제 뜻대로 된 것이지 아마 그 반대 상황이었다면 남편이 기어이 엄마께 드리는 돈을 깎고 말았을 것 같네요. 저는 남편이 저럴수록 더 열심히 일해서 빨리 승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연봉도 더 높아지고 부모님께 더 많이 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기 엄마에게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육아 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후부터 저는 이유 없이 눈치를 봐야 했어요. 단지 아기가 있다는 이유로 인사고과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야 했고 중요하지 않은 업무만 제게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엄마가 아기를 봐 주신다고 해도 엄마인 제가 직접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어요. 아기가 자주 아프기도 했고요. 그때마다 반차를 쓰게 되면 상사들이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억울한 건 하지 되고 그것을 기로 저는 할 수 없이 사표를 쓰게 됐습니다. 엄마 대신 제가 직접 헤아를 맡으면서 아기와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는 건 행복했지만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했어요. 월급으로는 우리 새 식구 먹고 사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헤아가 무럭무럭 잘할수록 아기에게 들어가는 돈이 만게 불어났고 사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굉장히 돌이었지만 결혼하고 아기를 키우면서 점점 더 심한 자린고비가 돼 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가 직장마저 잃으니 남편은 대놓고 저를 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님 보고 다시 취하라고 그러면 어떡해? 님이 취직 안 한다고 생각을 해야지. 저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갑자기 경기가 심하게 안 좋아져서 일하던 사람들도 일자리를 잃는 상황이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