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발조선의 역사와 위치, 석묘 및 도사 유적의 중요성을 고찰하며 상고사 복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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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Takeaways
- 고조선은 실존 국가였으나 역사적 사료가 부족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 석묘 유적과 도사 유적은 고조선 또는 발조선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 발조선의 위치는 춘추 시대 제나라의 7대 예물 출산지 기록을 통해 추정 가능하다.
- 중국 학계와 한국 학계 간 고조선 및 하나라 유적 해석에 차이가 크다.
- 상고사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이며 앞으로 더 많은 발굴과 연구가 필요하다.
What the video covers
- 고조선은 한국과 중국 문헌에 실존 국가로 기록되었으나 사료가 단편적이라 역사 복원이 어렵다.
- 고조선의 수도 위치에 대해 평양, 요양, 조양, 진황도, 북경, 산동반도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 관자의 기록에 등장하는 발조선의 무늬가죽과 7대 예물 출산지를 통해 발조선 위치를 추정한다.
- 석묘 유적은 섬서성 신목시에 위치하며 기원전 2300년경의 대규모 고대 도시 유적으로 평가된다.
- 석묘 유적의 왕성대는 축구장 10개 크기이며 고구려 성벽과 유사한 방어 구조를 가진다.
- 도사 유적은 석묘 유적 남쪽 500km에 위치하며 갑골문 원형으로 추정되는 도사 문자가 발견되었다.
- 도사 유적과 석묘 유적은 요임금 시대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고조선 또는 발조선 유적일 가능성이 있다.
- 중국 학계는 석묘 유적을 하나라 수도로 주장하나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하며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화하족과 하나라의 개념은 주나라 이후 형성된 것으로 상고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 고조선 역사 복원은 아직 미완성이지만 석묘와 도사 유적 발굴로 상고사 윤곽이 점차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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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aker A
안녕하세요. 강준식입니다.
Speaker A
먼저 멤버십에 가입해 주신 샨티 님, YKK9988 리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Speaker A
내가 사는 마을에 개나리가 피고 목련화가 폈습니다. 이제 곧 벚꽃도 만개하겠죠.
Speaker A
그러나 인생 경험으로 보면 그 봄이 순탄하게 지나가지만은 않더군요.
Speaker A
정말 지난 4개월간 잠 못 이루는 시간을 보내야 했던 우리에게 금년은 TS 엘리엇의 4월은 잔인한 달 같은 그런 계절의 반동이 없이
Speaker A
무난한 4월과 5월을 보내고 6월에 새 계절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Speaker A
지금 우리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은 다국화 시대입니다.
Speaker A
막 그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한자 강의 시간이므로 이만 자제하고 다시 중심 테마로 돌아가서 오늘은 우리 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 이야기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Speaker A
고조선은 한국과 중국 문헌에 기록된 실존 국가였음이 분명하지만은 막 기록들이 너무 단편적이에요.
Speaker A
어느 정도 내용이 실린 그 삼국유사의 경우도 왕검조선의 전문이 439자 위만조선의 전문이 626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Speaker A
물론 고인돌, 비파형동검, 미송리형토기 등의 유물도 있고 춘천 의암호에서 발굴된 유적지 같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Speaker A
여전히 고조선의 역사 전체를 복원할 수준은 되지 못합니다.
Speaker A
그렇기 때문에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학자마다 이야기가 다 달라요.
Speaker A
물론 그들 가운데는 자기 주장이 옳다고 다른 주장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지만은
Speaker A
막 그렇게 비판을 하는 쪽도 역으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Speaker A
누구도 다른 주장이 틀렸다고 평가할 정도의 충분한 사료적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죠.
Speaker A
막 그동안 내가 갑골문을 통해 밝히려고 애써온 그 동이족 이야기도 사실은 우리 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실체를 찾아가기 위한 막 궁여지책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Speaker A
맞춰야 할 그림은 큰데 막 그걸 완성할 조각들은 아주 조금밖에 없는
Speaker A
말하자면 정말 무모하고 고달프며 어려운 퍼즐 작업 같은 것이죠.
Speaker A
나도 그걸 압니다. 그러나 그냥 놔두면 고조선은 신화로 응고되거나
Speaker A
아니면 중국사로 흡수되고 말죠.
Speaker A
오늘 내가 다루려는 고조선도 뭐 완벽하거나 분명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Speaker A
하지만 이렇게라도 조금씩 맞춰 나가다 보면
Speaker A
언젠가 우리 상고사의 윤곽이 보다 선명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Speaker A
내 희망 사항입니다.
Speaker B
발조선의 수도
Speaker A
학교에서 우리는 고조선의 수도가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Speaker A
일제가 한반도 안으로 축소시킨 식민사관이 해방 후에도 막 그대로 답습이 되었던 거죠.
Speaker A
물론 신채호, 정인보, 박은식, 안재홍 등의 민족사학자들은
Speaker A
고조선의 수도가 요동에 있었다고 지적을 했지만 주류가 되지는 못했어요.
Speaker A
막 그러다가 해방 후 어떤 시점부터 종래 식민사관에 대한 반발이 일기 시작하면서
Speaker A
고조선의 수도가 조양, 적봉, 진황도, 북경 또는 산동반도에 있었다는 주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Speaker A
이러한 견해는 고조선의 강역이 적봉에서 북경에 이르던 옛 고죽국과 관계가 있다고 본 북한 사학계의 시각과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Speaker A
좀 복잡하죠.
Speaker A
네, 복잡합니다.
Speaker A
그래서 고조선의 수도 또는 중심 지역에 대해 지금까지 나와 있는 주류, 비주류의 주장을 모아 지도에 표시해 보면
Speaker A
1 평양, 2 요양, 3 조양, 4 진황도, 5 북경, 6 산동반도 등이 되고
Speaker A
혹자는 내륙의 산서성 또는 섬서성이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Speaker A
좀 많이 나아간 것 같기는 한데
Speaker A
그 나름에 다 근거가 있어요.
Speaker A
그래서 문헌적 사료 가운데 가장 먼저 고조선 이야기가 등장하는 관자의 기록을 좀 보실까요?
Speaker B
환공이 관자에게 물었다.
Speaker B
내 듣건대 천하의 귀중한 예물이 일곱 가지 있다던데 들어볼 수 있겠는가?
Speaker B
관자가 대답하였다.
Speaker B
음산의 연마대옥돌이 그 하나이고 연나라 자산의 백금이 그 하나이며 발조선의 무늬가죽이 그 하나이고 여수와 한수 사이의 길목에서 나오는 황금이 그 하나이며 강양의 진주가 그 하나이고 진나라 명산의 청색광물 증청이 그 하나이며 우시 변산에서 나는 옥이 그 하나입니다.
Speaker A
기원전 7세기에 제나라 환공이 천하의 7대 예문을 예물을 하문하죠.
Speaker A
이를 대답하는 관자의 말 가운데 발조선의 무늬가죽이 나옵니다.
Speaker A
이 발조선에 대해서 사학자 신채호는 신조선, 말조선, 불조선의
Speaker A
3조선 분립 시대의 불조선을 음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Speaker A
학계에선 신채호의 3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은 그럼에도 발조선이 고조선을 가리킨다는 점은 인정하는 것 같은데
Speaker A
나 자신은 발조선이 박조선 곧 밝은 조선에서 온 명칭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Speaker A
밝다는 것은 태양과 관계된 말이죠. 한민족의 역대 국호가 다 국호가 다 태양과 연관되었다는 점은
Speaker A
여러 번 강의를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Speaker A
그런데 문제의 발조선은 대체 어디에 위치해 있었을까요?
Speaker A
위치를 명확히 알려주는 문헌이 없기 때문에 관자의 기록된 7대 예물의 그 출산지를 지도에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Speaker A
춘추오패 중 첫 번째 패자가 되어
Speaker A
천하를 호령했던 환공 시대의 제나라 위치에서 보면은 남쪽으로 여산, 변산
Speaker A
그리고 서쪽에 강량, 명량, 명산 등이 보이죠?
Speaker A
북동쪽은 자산입니다.
Speaker A
대충 이 정도가 춘추 시대의 판도였고 지금의 중국처럼 그렇게 넓지가 않았어요.
Speaker A
따라서 이 시대의 제나라는 만주 동쪽의 그 조양이나 요양 또는 한반도의 평양 같은 곳은 알지도 못했고
Speaker A
관심도 없었을 거예요.
Speaker A
그럼 무늬가죽 곧 표범이나 호랑이 가죽이 난다는 발조선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요?
Speaker A
나는 발조선도 춘추 시대의 판도 안에 있었을 걸로 봅니다.
Speaker A
물론 관자의 다른 기사에는 8천리 밖에 발조선이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에
Speaker A
제나라가 위치해 있던 산동반도에서 평양까지의 실제 거리를 적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만
Speaker A
이어지는 기사에 보면 우시 부족의 변산도 8천리 밖 진나라 명산 쪽을 가리키는 곤륜지허도 8천리 밖
Speaker A
여기서의 8천리는 실제 거리였다기보다는 그냥 먼 곳이라는 뜻의 수식어로 사용되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Speaker A
그럼 당시의 거리 개념으로 제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발조선의 수도는
Speaker A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Speaker A
지도의 물음표를 찍은 지역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Speaker B
석묘유적
Speaker A
그곳의 현재의 이름은 섬서성 신목시입니다.
Speaker A
오르도스 사막과 접해 있는 그 북쪽 황토고원 지대에 해발 1300m의 거대한 그 돌언덕이 있는데
Speaker A
돌산이 있는데 이 돌언덕을 한자로 표기하면 석묘 중국어 발음으로는 시마오가 됩니다.
Speaker A
사진에 보시는 것처럼 이 돌언덕에서 여의도 면적의 절반이 넘는 대규모의 고대 유적이 발견되어 석묘로 명명하게 되었는데
Speaker A
그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중국 언론에서는 석묘의 수수께끼라거나
Speaker A
바위가 부서지고 하늘도 놀란다는 뜻의 석파천경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Speaker A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은 중국의 폼페이라고 했고 미국 고고학자 앨런 마카는
Speaker A
당대 지구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였다고 평가했습니다.
Speaker A
석묘 유적엔 황성대라 불리는 궁전터가 남아 있는데
Speaker A
당시의 황전은 없었으므로 나는 왕성대로 부르겠습니다.
Speaker A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피라미드 형태의 왕성대 위는 평평한데 거기에는 지금은 사라진 궁전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Speaker A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목조 건물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남아 있는 왕성대의 그 규모만 보아도 웅장하고 장엄합니다.
Speaker A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왕성대 위의 궁전의 크기는 축구장 10개 또는 8만 평방미터 곧 2만 5천 평 가량인데
Speaker A
이거는 서울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Speaker A
실로 엄청난 규모죠.
Speaker A
산을 깎고 그 위에 멀리서 운반해 온 돌을 70, 80m 높이로 쌓아 올린 일도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을 거예요.
Speaker A
이 정도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정치 사회적 인적 자원을 갖춘 강대한 나라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Speaker A
궁전터에서는 수십 명의 해골을 묻은 순장묘도 나왔다는 뉴스가 있어
Speaker A
동이족의 풍습을 떠올리게 합니다마는
Speaker A
유물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Speaker A
전체적으로 석묘 유적은 궁전이 있었던 왕성대와 그걸 둘러싼 내성 그리고 그걸 다시 둘러싼 외성 등 3개 기본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Speaker A
내성을 둘러싼 성벽의 잔전 길이는 2000m 면적은 약 235만 평방미터이고
Speaker A
외성을 둘러싼 성벽의 잔전 길이는 2840m 면적은 약 425만 평방미터인데
Speaker A
남아 있는 성벽의 실제 모양을 좀 보실까요?
Speaker A
어떻습니까?
Speaker A
돌로 쌓아 올린 성벽의 규모가 대단하죠.
Speaker A
때로 성벽의 돌출 구조나 방어용 그 요철 같은 게 보이는데 완벽히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은 고구려 성벽의 치와 유사한 점이 보입니다.
Speaker A
다음 사진의 성벽과 그 밑을 걷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비교해 보세요.
Speaker A
놀랍지 않습니까?
Speaker A
2019년 탄소 14 연대 측정을 해 본 결과 이 성모 유적은 기원전 2200년에서 2300년의
Speaker A
유적인 걸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Speaker A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의 유적이에요.
Speaker A
서기와 단기를 계산할 때 2333년이라는 숫자를 어릴 적부터 암기하고 있었던 나는
Speaker A
기원전 2300년이라는 숫자를 보자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Speaker A
오 그럼 여기가 발조선?
Speaker A
아직은 가능성일 뿐이죠.
Speaker A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이 보입니다.
Speaker B
이에 2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왕검이 있어 나라를 열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는데 고와 같은 시기였다.
Speaker A
고는 고려 정종의 이름이 요였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의미 비슷한 고로 표기했다는 해설도 있으나
Speaker A
그런 해설 이전에 설문해자주라는 책에 보면은 요는 고다.
Speaker A
요는 본래 고라 한다.
Speaker A
고는 요와 같은 글자였다니까 단군이 조선을 개국한 것은 요임금과 같은 시기였다는 얘긴데
Speaker A
그럼 요임금이 세웠다는 나라 이름은 뭐였을까요?
Speaker A
삼국유사에 이런 문장도 나옵니다.
Speaker B
당나라의 고가 즉위한 지 50년째인 경인년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다.
Speaker A
요임금이 세운 나라 이름이 당나라였다는 거예요.
Speaker A
7세기의 당나라도 있기 때문에 중국에선 옛 당나라라는 뜻으로
Speaker A
고당이라고 부릅니다. 그 고당과 조선이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면
Speaker A
석묘 유적 외에 또 하나의 유적도 있지 않을까요?
Speaker B
도사유적
Speaker A
네, 있습니다.
Speaker A
석묘 유적에서 남쪽으로 500km 떨어진 그 인분시 부근에 도사 유적이 있어요.
Speaker A
이 유적 또한 기원전 2300년 전의 것이라고 합니다.
Speaker A
도사 유적은 해발 1300m의 돌언덕에 위치한 그 석묘 유적과 달리 거의 평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Speaker A
도사 유적은 외성, 내성, 궁전의 3개 기본 구조로 된 석묘 유적보다 규모가 좀 작지만 그래도 궁전, 백성 주거지, 수공업 수공업 단지, 묘역, 창고, 관상대 등등을 포함하면은
Speaker A
총 면적이 400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그래요.
Speaker A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유적에서 갑골문의 원형으로 보이는 도사 문자가 네 개 발견되었는데 그중
Speaker A
도자기에 그 주사로 쓰인 글자 두 개를 보여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Speaker A
왼쪽은 그 술독을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은 이를 스케치한 그림이에요.
Speaker A
고대 유물의 술독이나 술항아리가 자주 보이니까 고대인은 술을 좋아했나 보다 하고 문의하신 분도 있었는데
Speaker A
고대 술은 아주 귀한 거라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던 거였어요.
Speaker A
고분 등에서 자주 출토되는 술독은 바로 그 제사용의 술을 담았던 그릇이었는데
Speaker A
1번에 쓰여진 글자는 한글 을 을자 비슷하고 2번에 쓰여진 글자는 그럴 문자 비슷합니다.
Speaker A
2번의 글자가 그럴 문자의 초기 형태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나 1번의 글자에 대해서는 이게 역자다.
Speaker A
명자다라는 식의 그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은 갈영회, 하노 등의
Speaker A
북경대학 고고학 교수들은 요자로 해석하는 것을 지지했는데
Speaker A
이 견해에 상당수의 학자들이 동조를 하고 있습니다.
Speaker A
만일 1번 글자가 요임금 시 확실하다면
Speaker A
본래 요임금의 성은 이기이고 호는 도당이며 이름은 방훈이었는데
Speaker A
왜 그를 요임금이라 불렀던 걸까요?
Speaker A
나 자신은 도사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요임금 요자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건지 갑골문을 통해 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Speaker A
그 밑은 갑골문 밑은 구부리고 앉은 사람을 스케치한 그림이고 위는 머리에 또는 양 어깨에 짐을 지거나
Speaker A
짐을 이거나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짐은 다름 아닌 흙덩이였다고 합니다.
Speaker A
갑골문을 살펴보았으니까 두 번째 금문부터 보기로 하죠.
Speaker A
금문은 선 사람이 흙덩이 한 개를 머리나 어깨에 이거나 짊어진 모습
Speaker A
세 번째 그 소전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머리나 어깨에 흙덩이를 이거나 짊어진 그림입니다.
Speaker A
그리고 네 번째 해서에 오면 머리나 어깨에 흙덩이를 세 개 이거나 짊어진 사람이
Speaker A
일어나려는 모습을 그린 건데 그 이 흙덩이는 대체 뭘 하기 위한 거냐?
Speaker A
여기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Speaker A
하나는 도자기를 굽기 위한 흙덩이였다는 겁니다.
Speaker A
고대인은 자기 부족이나 연맹을 위해 창조적인 문명을 행한 지도자를 수령으로 삼았는데
Speaker A
가령 최초로 산을 태워 산의 숲을 태워 화전밭 일구는 방법을 보급시킨 수령을 염제라 칭했고
Speaker A
활쏘기를 최초로 보급했다는 수령을 황제 최초로 익힌 음식을 먹는 제도를 보급시킨 수령을 순임금이라 했듯이
Speaker A
최초로 도자기 제조 기술을 보급한 수령을 요임금이라 칭했다는 겁니다.
Speaker A
도당의 도자는 도자기 도자죠.
Speaker A
다른 해석은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짊어진 짐이 도자기를 굽기 위한 흙덩이가 아니라
Speaker A
집을 짓기 위한 흙덩이나 돌멩이였다는 겁니다.
Speaker A
상고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둥지에 살았지만은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총이 증가하면서 살림을 떠나 평원 지대에서도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Speaker A
여기서 비바람을 피하려면 피하려면 거처를 직접 지어야만 했습니다.
Speaker A
여기에 필요한 것이 흙과 벽돌이죠.
Speaker A
문제는 어떻게 하면 거처를 쉽게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거였어요.
Speaker A
이에 흙과 벽돌로 높은 벽을 쌓는 기술을 보급한 수령을 요임금이라 칭하게 되었고
Speaker A
높이 쌓으니까 요가 높다는 뜻의 고자와 같은 글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Speaker A
1978년 도사 유적이 발굴된 이래 중국 학계에선 이곳이 하나라 수도였다는 식의 주장을 부단히 펴 왔는데
Speaker A
그 가운데는 검은 학자들도 많았어요.
Speaker A
정말 도사 유적이 하나라 것이었을까요?
Speaker A
그러나 발굴이 진전되고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도사 유적이 하나라 것이었다고 주장하던 학자들도 기존 판단을 포기하고
Speaker A
도사 문화는 요임금설, 순임금설 또는 요순설로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공감대가 점차 형성되어 왔습니다.
Speaker A
우리가 살펴본 도자기의 요자가 큰 영향을 미쳤던 거죠.
Speaker A
그럼 요임금과 비슷한 시기에 개국을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도사 유적과 함께 기원전 2300년경에 세워진 석묘 유적은
Speaker A
고조선 또는 발조선의 유적이었을까요?
Speaker B
어른거리는 고조선
Speaker A
석묘 유적은 1976년에 발견되었지만은 대규모 발굴 작업은 2011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Speaker A
아직은 발굴의 진전을 더 기다려야 하죠.
Speaker A
그러나 중국 학계에서는 석묘 유적이 조선이나 발조선이 아니라 하나라 수도였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Speaker A
그들은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 기록된 황제가 붕어하자 교산에 장사 지냈다.
Speaker A
라는 문장을 인용해 황제릉이 석묘 유적에서 멀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Speaker A
그러나 실제 지도를 보면 황제릉은 석묘 유적보다는 도사 유적 쪽에 더 가까워요.
Speaker A
이 점을 지적하니까 중국 학계에서는 한서 지리지에 황제의 사당이 네 곳이 있다.
Speaker A
라는 그 한서 지리지를 인용하면서 한 곳은 연한 부근에 있고 한 곳은 자장 부근에 있으며 한 곳은 어딘가에 있지만은 마지막 한 곳은 석묘 유적이 위치한 신목시에 있다고 반박을 했어요.
Speaker A
심장운, 이화, 한건업 등 많은 그 중국 학자들이 석묘 유적의 하나라설을 주장했는데
Speaker A
그 이유는 방대한 규모의 석묘 유적이 탐났기 때문이죠.
Speaker A
외성과 내성에 둘러싸인 엄청난 규모의 궁전은 강대국이어야만 가능한데 그게 화하족의 첫 국가인 하나라여야만
Speaker A
그 후손인 화하족 곧 중국인의 역사적 위신이 선다는
Speaker A
뭐 그런 거였겠죠.
Speaker A
마침 화하족의 시조인 황제 사당도 그 부근에 있지 않느냐.
Speaker A
이때의 황제는 엠페러가 아니고 누를 황자의 황제라는 사람 이름인데요.
Speaker A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누를 황자의 황제를 정점으로 그 후손들이 하상조 3대를 쭉 이어져 나왔다는 식의 논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Speaker A
이를테면 고힐강, 부사년, 서욱생 같은 그 중국의 저명 사학자들도 부정을 했어요.
Speaker A
사마천의 사기가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데 그 뒤에 집필된 역사서들은 대체 어디에 근거해서
Speaker A
이런저런 역사적 사실들을 그럴듯하게 적었을까요?
Speaker A
내가 여러 번 언급했듯이 화하족이라는 것도 주나라가 생긴 이후 공자가 주나라 족속과 동이족을 구별한
Speaker A
이른바 화이 지변의 작업 이후에 사마천이 황제를 주나라 사람의 시조로 갖다 앉힌 뒤에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Speaker A
적어도 주나라 이전으로 올라가면 화하족 자체가 없어요.
Speaker A
하나라가 존재했다는 점을 입증해 줄 아무런 고고학적 유적이 발견되지를 않잖아요.
Speaker A
그래서 저들은 석묘 유적이나 도사 유적을 끌어당기려고 한 겁니다.
Speaker A
하지만 두 유적 모두 하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어요.
Speaker A
도사 유적의 경우에 도당이라는 요임금의 호에서 우리는 당나라의 이름을 추출해 낼 수가 있잖아요.
Speaker A
석묘 유적이 하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결정적 증거가 뭐냐 하면은 건국 연도입니다.
Speaker A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하나라 개국은 기원전 2070년이었다고 못 박았는데
Speaker A
석묘 유적은 그보다 200여 년 앞선 기원전 2300년 경이거든요.
Speaker A
과학적 검사 결과 말이죠.
Speaker A
특히 궁전의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Speaker A
탐이 날 거예요.
Speaker A
그러나 저들에게는 하나라 이전의 국가가 존재하질 않아요.
Speaker A
사실 석묘 유적이 처음 발견된 건 1927년입니다.
Speaker A
당시 천진에서 발간되던 대공보라는 이름의 신문에 그 사실이 처음 보도가 되었는데
Speaker A
기사 제목이 섬서성 북쪽에서
Speaker A
한 흉노 유물 발견이라고 되어 있어요.
Speaker A
그러나 당시는 아무도 주목하질 않았습니다.
Speaker A
그렇게 경시된 것은 석묘 유적이 명나라가 쌓은 말리장성 밖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에요.
Speaker A
그렇기 때문에 흉노의 산채 정도로 여겨졌던 거예요.
Speaker A
아니면 명나라가 쌓은 말리장성이 좀 허물어진 그런 게 아니냐.
Speaker A
왜냐하면 옛 문헌 어디에도 이 유적의 존재를 알리는 기록이 없었으니까 말이죠.
Speaker A
그러다가 1958년 전국 문물 조사할 때 네 명의 조사 대원이 파견되어서 그곳을 탐사한 뒤에
Speaker A
석묘 유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는데 역시
Speaker A
그 뒤로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1976년
Speaker A
고고학자 대응신이 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 현장을 답사한 이후에 서안과 북경의 고고학 팀이
Speaker A
발굴을 진행하게 되면서 비로소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Speaker A
그리고 일단의 과학자들이 2019년에 탄소 14 연대 측정을 해 보았더니 기원전 2200년에서 2300년의 것으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Speaker A
그런데 기원전 2300년의 중국 대륙에는 국가다운 국가가 없는 거예요.
Speaker A
사마천의 사기에 최초의 하나라 건국이 기원전 2070년으로 기록이 되어 있었거든요.
Speaker A
그럼 궁전 규모로와 강대 세력이었던 것이 분명한 석묘 유적의 나라
Speaker A
곧 석묘 왕국은 대체 뭐냐?
Speaker A
그게 중국 학계의 고민거리입니다.
Speaker A
막연히 북방 세력이라든가 흉노 세력의 유적이라는 사람도 있지만은
Speaker A
기원전 2300년경의 북방에 그런 강대한 나라가 있었느냐.
Speaker A
아니 중국 내륙에도 그런 나라가 있었느냐.
Speaker A
없거든요.
Speaker A
하지만 우리 역사에는 있었죠. 네 고조선.
Speaker A
관자의 기록된 발조선이었을런지도 모릅니다.
Speaker A
결론은 일러요.
Speaker A
석묘 유적의 대규모 발굴 작업이 시작된 것은 2011년부터였기 때문에 아직은 발굴과 연구의 진전을 막 더 기다려야 합니다.
Speaker A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에서 동이족의 특징이었던 순장묘가 발견되었다는 점.
Speaker A
고구려 성의 특징이었던 치가 보인다는 점 등이 눈에 띕니다.
Speaker A
그리고 2000 기원전 2300년 전이라는 이것이 무언가를 우리에게 시사해 줍니다.
Speaker A
석묘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로는 제의적인 의미를 지닌 두 신의 얼굴이 새겨진 큰 석조상이 있고
Speaker A
다른 형태의 석조상들도 있습니다.
Speaker A
얼굴 표정을 보면 근엄하고 약간 화가 난 듯한 모습이기도 해요.
Speaker A
성벽에 부조된 이 얼굴들은 내 눈에는 다 같아 보이는데 왜 이렇게 성벽 곳곳에 설치해 두었던 걸까요?
Speaker A
재정 일치 시대였으니까 이는 신인 동시의 통치자의 얼굴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Speaker A
그렇다면 혹 단군의 얼굴일까? 그냥 나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Speaker A
소와 양 등의 동물 부조도 보이고
Speaker A
화살로 말을 쏘는 부조도 보입니다.
Speaker A
독수리 도자기도 보이네요.
Speaker A
부조된 벽화 가운데는 용 그림도 보이고
Speaker A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사람에게 덤비는 그림도 보입니다.
Speaker A
재미있는 것은 석묘 유적의 궁전에서 악어를 키우던 연못이 발견되었고
Speaker A
거기서 악어뼈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Speaker A
조사를 해 본 결과 양자강에 살던 악어와 같은 거였다고 그래요.
Speaker A
당시 석묘 왕국에서는 악어를 키워도 될 정도로 좀 따스한 기온이었다는 뜻도 됩니다.
Speaker A
석묘 왕국의 사람들은 사진과 같은 악어 가죽을 이용해 가지고
Speaker A
제의용 북이나 장구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Speaker A
또 옥을 아주 좋아했던 것 같아요.
Speaker A
석묘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옥기를 사진으로 보여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Speaker A
이런저런 그 옥으로 만든 물건들이 많이 보이죠.
Speaker A
뼈를 또 활용해서 화살촉도 만들고
Speaker A
입으로 부는 구황 고대판 하모니카 비슷한 구황이라는 악기도 만들었다 그래요.
Speaker A
또 옷을 깃기 위한 뼈바늘도 만들었는데
Speaker A
놀라운 것은 석묘 유적의 집터에서 출토된 솥 안에 아기 유골에 붙어 있던 4300년 전의 섬유 조각이 발견된 사실입니다.
Speaker A
배옷 조각인데
Speaker A
잘 보세요. 가로 세로로 짠 흔적이 보이죠?
Speaker A
이미 그 시절에 배옷을 짜서 입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죠.
Speaker A
자 이렇게 보면은
Speaker A
석묘 왕국은 결코 간단한 나라가 아니었어요.
Speaker A
앞에서 뼈 화살촉의 유물을 보여드렸지만은
Speaker A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엄청나게 크고 높은 성벽은 외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거죠.
Speaker A
그만큼 군사력이 대단했다는 반증도 됩니다.
Speaker A
크고 강한 나라 내게는 어쩐지 이게 고조선일 것만 같은데
Speaker A
이 왕국은 기원전 1800년경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Speaker A
명확한 이유는 밝혀진 게 없지만은
Speaker A
주변 환경의 악화 다시 말하면 사막화 현상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Speaker A
숲이 사라지면서 추위를 이겨낼 연료가 고갈이 되고 농사도 되지를 않으니까
Speaker A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거죠.
Speaker A
고조선을 찾는 길은 정말 지난합니다.
Speaker A
그래도 다시 찾아 나서겠습니다.
Speaker A
응원해 주시고 동참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Speaker A
오늘은 여기서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Speaker A
감사합니다.
Speake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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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ake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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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ake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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