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가 증언하는 부여의 진짜 강역! 지도가 바뀌면 역사가 바뀐다 (한자83강-부여강역) — Transcript

부여의 진짜 강역과 역사적 위치를 고찰하며 기존 학설을 뒤집는 도발적 질문과 새로운 해석을 제시합니다.

Key Takeaways

  • 부여의 진짜 강역은 기존 송화강 유역이나 압록강 주변이 아니라 훨씬 서쪽과 북쪽일 가능성이 크다.
  • 수나라 대군의 원정 경로와 군량 문제로 볼 때 기존 평양 위치 해석에 의문이 제기된다.
  • 고려 시대 학자 이승휴의 요하 유역 부여설은 주류 학설과 달리 중요한 역사적 근거를 제공한다.
  • 부여는 상나라 및 은나라 시대부터 존재한 고대 제국으로, 단순 부족국가가 아니다.
  • 기존 사료 해석과 주류 학설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여 역사를 재조명해야 한다.

Summary

  •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모태이자 우리 역사의 거대한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변방의 작은 나라로 치부되어 왔다.
  • 기존 학계는 부여를 송화강 유역이나 압록강 주변으로 한정했으나, 이는 사료 부족과 중국 사서의 왜곡 때문일 수 있다.
  • 수나라 113만 대군의 원정 경로와 군량 문제를 분석하며, 실제 부여 강역이 기존 설보다 훨씬 서쪽과 북쪽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 부여의 시조 동명이 바이칼 호수 근처 부랴트족 코리 시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으며, 엄표수 강의 위치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비교한다.
  • 광개토대왕릉비에 등장하는 엄리대수와 압록강의 관계, 그리고 부여의 위치에 대한 기존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 고려 시대 학자 이승휴는 부여의 옛 땅이 요하 유역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이는 주류 학설과 배치된다.
  • 삼국지와 한서 등 고대 중국 사료를 통해 부여가 장성 북쪽, 현도군 인근 내몽골 초원 지대에 있었을 가능성을 탐구한다.
  • 부여가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상나라 문화권과 연결되어 있었고 은나라 때부터 영고 제례를 행한 기록이 있다.
  • 주류 학설이 부여의 고대성을 축소하고 기원전 4~3세기로 한정하는 것은 후대 기록의 신뢰 문제와 고유 기록 부재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 부여는 단순 부족국가가 아닌 상나라 시대부터 대륙을 호령한 장구한 제국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역사 재해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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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Speaker A
안녕하세요, 강준식입니다.
00:04
Speaker A
먼저 자료 수집팀에 재가입해 주신 @lkh-y1p님. 대본 집필팀에 가입해 주신 @jinkyunglee6314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00:20
Speaker A
여러분, 한국 고대사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부여예요.
00:30
Speaker A
막 고구려와 백제의 모태이자 우리 역사의 거대한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부여를 변방의 작은 나라로 치부해 왔습니다.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였죠.
00:48
Speaker A
하지만 오늘 우리는 고구려의 기록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부여의 진짜 영토를 되찾아 보려고 합니다. 막 기존 학계는 부여를 길림이나 하얼빈 근처, 즉 압록강 위 송화강 유역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01:51
Speaker A
자치통감에 기록된 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다.
01:58
Speaker A
라는 짧은 문구에 갇힌 결과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02:05
Speaker A
패배를 감추고 승리를 부풀리는 중국의 이른바 휘패과승적 사필이 우리의 영토를 아담하게 축소시켰던 건 아닐까요?
02:22
Speaker A
막 그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는 오늘 한 가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 보려고 합니다.
02:32
Speaker B
수나라의 113만 대군은 정말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을까요?
02:38
Speaker B
총 113만 3천 8백 명인데 200만이라 불렀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자는 그 2배였다.
03:25
Speaker A
막 자치통감이나 수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수나라 군대는 장안, 탁군 평양의 행군 경로로 약 2,000km를 이동했어요.
03:40
Speaker A
하루에 25km씩 행군할 경우에 모두 80일이 걸립니다. 그 80일 동안 113만 명이 먹을 식량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03:55
Speaker A
막 병사 1명당 하루 1.5kg으로 잡으면 1,695톤이고 80일이면은 135,600톤이 됩니다. 이 엄청난 군량을 한 대당 400kg씩 적재할 경우 모두 34만 대의 수레가 필요하고 그 수레를 끄는 동물이 소라면은 34만 마리, 말이라면은 68만 마리가 필요해요. 믿어지세요?
05:16
Speaker A
사수엔 군역자가 병사의 배가 된다고도 했는데 막 그들을 빼고 계산한 것만 해도 이런 숫자가 나오는 겁니다.
05:30
Speaker A
또 가는 동안 소나 말도 먹어야죠. 곡물이나 풀 등 그 우마의 사료는 사람의 식량보다 다섯 배에서 열 배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 사료를 싣기 위해 또 다른 수레가 필요하고 그 수레를 끄는 우마가 또 사료를 먹어 치우는 식의 Infinite Loop 곧 무한루프에 빠지게 되는데
06:42
Speaker A
여러분, 이 어마어마한 군량미를 실은 수레의 행렬이 무려 2,000km예요. 이론적으로는 첫 번째 수레가 평양에 도착할 때 마지막 수레는 아직 장안을 출발하지도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07:04
Speaker A
막 군사 학자들은 고대 원정군의 한계를 고작 2주에서 3주의 행군 거리로 봅니다. 따라서 수나라 113만 대군 아니 나중에 별동군 30만 명이 향했던 곳도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장안에서부터 2~3주의 행군 거리에 있던 어떤 다른 지역이었던 게 아닐까?
07:36
Speaker A
막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수나라의 칼끝이 향했던 진짜 평양 그리고 그 평양 위쪽에 있었던 부여 강토는 어디였던 걸까요? 오늘 이 거대한 역사의 퍼즐을 여러분과 함께 맞춰 보겠습니다.
08:38
Speaker B
부여의 발자취
08:40
Speaker A
이제 부여라는 이름의 뿌리부터 조심스레 파헤쳐 보겠습니다.
08:46
Speaker A
부여는 기록에 따라 막 한자로 부여, 부여, 부여, 부여, 부여, 부여 등 다양하게 쓰였지만은
09:02
Speaker A
그 어원에 대해서는 막 벌판을 뜻하는 벌, 푸후, 만주어로 혹은 광명을 뜻하는 밥, 박다의 밥이나 어 불 불타오르는 불 불 등 여전히 뜨거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죠. 하지만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이름보다도 그들이 처음 발을 딛고 선 땅이 Where? 막 기존 학설은 부여가 하얼빈 부근의 송화강 송화강 유역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10:16
Speaker A
하지만 1세기 왕충이 쓴 논형에는 흥미로운 단서가 등장합니다.
10:35
Speaker B
북쪽 이민족인 탁리국 왕의 시비가 임신하자 왕이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 동명이 활을 잘 쏘니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했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엄표수에 이르렀고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물을 건너니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도읍을 정하고 부여의 왕이 되었다.
11:46
Speaker A
막 부여의 시조 동명이 탁리국에서 탈출을 해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죠. 여기서의 탁리는 3세기의 위략에는 고리 4세기의 수신기에는 고리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 보면 논형의 탁리는 막 글자의 모양과 뜻이 비슷한 고리를 잘못 쓴 것 같아요.
12:19
Speaker A
그런데 이 고리는 막 한자 82강에서 강의했던 것처럼 부랴트족의 구성원 가운데 대표적인 시족 호리(Khori) 또는 코리(Khori)와 같아서 이 몽골어에서는 이 호와 코의 중간 발음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말로는 호리나 코리로 이렇게 표기를 하는 겁니다. 동명의 출발점은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살던 부랴트족의 코리 시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13:38
Speaker A
바이칼호수 우리가 알던 송화강보다 훨씬 더 북서쪽 대륙의 깊은 곳이죠.
13:49
Speaker A
동명이 추격군을 다 돌리고 건넜다는 결정적인 강 엄표수를 기억하십시오.
13:58
Speaker A
막 도표에 보시는 것처럼 사서마다 강 이름이 다르게 기록이 되었어요. 이거는 각 사서의 편찬자가 그 강을 직접 알지는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가장 막 신뢰할 만한 기록은 돌에 새겨진 광개토대왕릉비인데
15:04
Speaker B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길은 부여의 엄리대수를 경유하였다. 그 뒤 나루를 만들어 건넜고 비류곡 홀본의 서쪽 산성 위에 올라 도읍을 세웠다.
15:16
Speaker A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여의 건국 신화와 대동소이한 막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강 이름은 엄리대수예요.
15:32
Speaker A
엄리대수는 막 엄리라는 큰 강이라는 뜻으로 그 대수 앞에 그 엄리를 아리의 차자로 보는 분도 있어요. 아리수 할 때 그 아리. 아리가 크다는 뜻이고 막 대수 한자 대수도 큰 강이라는 뜻인데 막 신당서에는 압록수 곧 압록강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을 해요.
16:43
Speaker B
물빛이 오리의 머리색과 같아 압록수라 불렀다.
16:48
Speaker A
압록강이 뭐 큰 강인 것은 틀림이 없죠. 이에 고려 시대의 지리서들은 엄리대수를 압록강으로 보았고 이후 현재의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인식이 되어 왔습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서
17:08
Speaker A
문제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문장이에요. 거기에는 분명 부여의 엄리대수라고 되어 있어요.
17:25
Speaker A
엄리대수가 부여의 강력 안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엄리대수 곧 압록강을 건넌 후에 도읍했다는 고구려는 어디가 됩니까?
17:39
Speaker A
한반도 북쪽이었다는 얘기가 되나요? 이 점이 막 기존 설과 어긋나니까 이번에는 엄리대수를 압록강 위에 하얼빈 북쪽에 흐르는 송화강 쪽에 비정을 합니다.
18:20
Speaker A
이렇게 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엄리대수나 엄표수를 압록강 내 또는 송화강으로 해석을 해 왔던 거예요.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18:47
Speaker A
압록이라는 이름이 신당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동명의 시대보다 천 수백 년 뒤인 11세기의 일이에요. 시대적 간극이 너무나 큽니다.
19:07
Speaker A
그런데 부여의 옛 땅이 압록강 주변이나 그 북쪽인 송화강 유역도 아니었다는 견해를 피력한 고려 학자가 있습니다.
19:19
Speaker B
신이 일찍이 사신으로 상국에 갔을 때 요하의 강변길에 무덤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여의 부마대왕의 무덤”이라고 했다. 또 가탐이 말하기를 큰 평원 남쪽의 압록강 일대는 모두 부여의 옛 땅이니 북부여는 마땅히 요하 유역에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20:20
Speaker A
제왕운기를 집필한 그 고려 시대의 학자 이승휴는 자신이 사신으로 직접 중국에 갔을 때 현지에서 보고 들은 것과 당나라의 저명한 지리학자 가탐의 기록을 인용하여 부여의 위치는 요하 일대였다는 의견을 제시했어요.
20:56
Speaker A
부여의 위치가 송화강 유역이 아니었다는 점을 처음으로 지적한 글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이승휴는 현재 우리나라의 주류 학설이 주장해 온 부여의 강력 그리고 그 밑쪽에 있던 고구려 강력의 위치를 일단 부정을 한 거예요. 자, 이제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운 이른바 반도 사관의 틀을 깨고 새로운 관점에서 부여를 다시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송화강 일대가 아니라 요하 요하 일대였다는 이승휴의 주장은 맞는 것이었을까요?
22:16
Speaker B
부여의 시간을 깨우다
22:19
Speaker A
지금부터 부여의 실체를 찾아 3세기 삼국지의 기록 속으로 들어갑니다.
22:26
Speaker B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고 현도군에서 1천리 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
22:34
Speaker A
여기엔 부여의 위치를 가리키는 두 개의 결정적인 이정표가 등장을 합니다. 바로 장성과 현도군인데요. 우선 장성부터 따져 보죠.
23:29
Speaker A
장성은 진시황 때 쌓은 진장성, 진나라 장성이라 그런 뜻이에요. 진장성, 한나라 때 쌓은 한장성, 한나라 장성, 명나라 때 쌓은 명장성, 명나라 장성. 이 세 종류가 있는데
23:54
Speaker A
삼국지가 편찬된 시기의 장성 곧 만리장성이라는 것은 진시황이 흉노를 막기 위해 음산산맥을 따라 쌓았던 그 성벽을 가리킵니다.
24:15
Speaker A
주류 학설이 말하는 송화강이나 이승휴가 주장한 요하 일대에는 그런 장성이 존재하지를 않았어요. 그렇다면 부여는 우리가 배운 것보다 훨씬 더 서쪽 하북성 북쪽에 광활한 대륙에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25:08
Speaker A
그렇다면 현도군은 어디였을까요?
25:13
Speaker A
삼국지의 기록을 다시 보면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고 현도군에서 1천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서 현도군이 장성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죠.
25:30
Speaker A
북한 학계에서는 현도군의 위치를 함경도에 비정을 하고 주류 학설에서는 만주의 집안이나 무순 일대에 비정을 하지만은 막 그곳에서 천리를 동쪽으로 가면 동해가 나오죠.
25:56
Speaker A
북쪽으로 가면 송화강 유역이 나오는데 거기에 무슨 장성이 있었습니까? 요하 일대도 마찬가지예요. 거기 무슨 장성이 있었나요?
26:43
Speaker A
막 소수설의 난하 일대는 동쪽에 막 산해관까지 이어지는 장성이 있어 막 그럴듯해 보이지만은 그 장성은 15세기경 명나라 때 축조된 거예요.
26:59
Speaker A
지난 시절에도 그곳에 장성의 선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은 원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한 동기가 뭐였나요? 북방의 흉노를 막기 위한 거 아니었어요?
27:16
Speaker A
하지만 난하 동쪽에는 흉노가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거기도 무슨 장성을 쌓았다는 겁니까? 15세기에 와서 명나라가 산해관으로 이어지는 장성을 쌓은 것은 흉노가 아닌 여진이나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한 거였어요.
27:37
Speaker A
자, 함경도나 만주도 아니고 요하 일대나 난하 일대도 아니면 현도군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걸까요?
28:29
Speaker A
나는 주류 학설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유주설을 지지하는데 그 이유는 한서 지리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28:45
Speaker B
현도군은 한무제 원봉 4년에 설치되었다. 유주에 속하는데, 속현은 3곳으로 고구려, 상은태, 서개마이다.
28:54
Speaker A
현도군은 유주에 속하는데 유주의 중심은 예나 지금이나 북경 일대예요.
29:02
Speaker A
북경에서 북쪽으로 천리를 올라가 보세요. 그곳은 만주의 벌판이나 살림 지대가 아니라
29:11
Speaker A
내몽골의 끝없는 초원 지대예요. 바이칼에서 남아한 동명의 발걸음이 머물기에 가장 적합한 땅 바로 그곳이 부여의 진정한 강력이었던 셈입니다.
30:08
Speaker A
여기서 우리는 부여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 그 시간의 심연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30:18
Speaker A
막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요순 시대부터 주나라까지의 정치사를 기록한 그 상서가 있는데
30:34
Speaker A
그 상서에 들어가지 못한 주나라 문헌들을 모아 편찬한 책이 일주서예요.
30:44
Speaker A
이 일주서라는 책의 왕회편은 그 주나라 성왕 7년에 수도인 호경 곧 훗날의 장안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는데 그때 참석했던 이민족의 이름과 그들이 바친 그 공물의 내용을 기록한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부분이 실려 있습니다.
31:46
Speaker B
직신은 큰 사슴을 바쳤다. 예인은 전아를 바쳤는데, 전아는 원숭이와 같아서 서서 걷고 소리가 어린아이 같다.
31:56
Speaker A
직신은 숙신이고 예인은 예맥 할 때의 예 사람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32:06
Speaker A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숙신은 저 만주 흑룡강 유역에 있었다는데 어떻게 장안까지 왔느냐 하는 것이 의문점으로 남습니다.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주나라의 통보를 받고 예물을 준비하고 오는 시간까지 합치면 족히 수개월은 걸렸을 거예요.
32:34
Speaker A
뭐 교통편은 또 그렇다 치고 기원전 1042년의 시점에서 주나라가 과연 만주 깊숙한 곳의 지역 사정까지도 알고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짙게 드는데 실제로 삼국지가 편찬된 서기 3세기 전까지는 중국 쪽에서 만주의 사정을 사실은 전혀 몰랐어요.
33:50
Speaker A
이럴 테면 최초의 역사서라는 사마천의 그 사기에 보면은 연나라는 북쪽으로 오환 부여와 이웃해 있다. 라고 부여에 대한 기사가 딱 한 줄만 기록이 되었을 뿐이고 막 그다음에 편찬된 한서도 마찬가지예요. 다행히 3세기 진수가 편한 삼국지가 만주의 사정을 이것저것 적어 놓기는 했는데 그것도 사실은 서기 244년 그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얻은 군사 정보에 의한 것이었어요.
35:01
Speaker A
그런데 그보다 1300년 전에 주나라가 만주 한가운데 있었다는 숙신에게 집회 참석을 통보했다는 게 믿어지세요?
35:20
Speaker A
더구나 숙신 숙신과 함께 거론된 그 예는 예인 예인 예는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였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추도라는 그 청나라 말기에 그 지리학자가 자신이 집필한 주서 왕회편 전석이라는 그 책에서
35:49
Speaker B
부는 곧 부여이고 왕회편의 예인이 바로 그것이다. 예는 곧 부여 두 글자의 합음이다.
36:50
Speaker A
라고 그 예는 부여의 두 글자를 합쳐 빨리 발음한 것이라는 그 주장을 내놓았어요. 막 이 같은 음운학적 시도는 그 합음 과정이 막 명확히 증명되지는 않는다는 약점이 있지만은
37:10
Speaker A
주로 북 중국 북방의 변경 지리를 연구한 하추도가 청나라 고증학의 전통을 살려 문자와 음운을 통한 그 고대 지명과 정명을 비정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던 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막 그냥 무시할 수만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37:37
Speaker A
그런데 예와 부여의 관계를 언급한 삼국지의 기사가 있어서 눈길을 끌어요. 한나라 때엔 부여왕의 장례에 옥으로 만든 관을 사용하였는데 평소에 미리 그것을 현도군에 맡겨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장사 지냈다.
38:22
Speaker A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으로 만든 벽, 규, 찬 등 여러 대를 전해오는 물건이 있어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선대의 왕께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 도장엔 예왕지인이라 새겨져 있고 나라 안에는 예성이라는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이는 본래 예맥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여왕은 그 가운데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망명인이라 칭하니 여기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듯하다.
39:08
Speaker A
막 이는 예가 부여보다 먼저 있었고
39:17
Speaker A
나중에 부여로 합쳐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사여서 하추도의 주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막 그의 주장대로 예 아니 그 부여가 주나라 성왕의 잔치에 참석을 했다면 그 부여의 뿌리는 기원전 1040년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39:49
Speaker A
부여라는 나라가 사실은 주나라 이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는 삼국지의 기사가 하나 더 있어요.
40:20
Speaker B
은나라 정월을 기준으로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라 안에 크게 모여 연일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이를 “영고”라 하였다.
40:40
Speaker A
고대 달력은 왕조의 그 정통성을 나타내는 핵심 요소인데 부여가 바로 그 은나라 곧 상나라의 달력을 사용했다는 것은 상나라 문화권과 연결된 나라였다는 그 의미이고 막 그렇다면 상나라가 아직 존재했을 당시에도 부여가 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기사도 있어요.
41:51
Speaker B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자 해동의 여러 이민족 가운데 부여에 속한 자들도 모두 길을 통하게 되었다.
42:05
Speaker A
이 기사는 기원전 2세기에 복생이 편한 상서 대전에 실려 있는데 부여가 주나라 무왕 시절에도 존재했었다는 내용이에요. 기원전 11세기 아니 그 이전부터 대륙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서 있었던 부여. 막 당시 사정에 어두웠던 후대의 기록들 그리고 패배를 감추려 했던 사필들이 부여의 시간을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로 뚝 잘라 버린 건 아니었을까요?
43:31
Speaker A
주류 학설이 외면해 온 이 많은 사료들은 지금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부여는 단순한 부족 국가가 아니라 상나라 시대부터 대륙을 호령해 온 장구한 제국이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류 학설에서는 왜 이 같은 사료들을 무시하고 기원전 4세기나 3세기라고 주장을 하는 걸까요?
44:05
Speaker A
지워진 제국의 좌표
44:08
Speaker A
주류 학계는 이렇게 말합니다. 상서 대전이나 삼국지 같은 사료들은 모두 주나라 당시가 아니라 후대의 기록된 것이라 믿을 수가 없다고 말이죠. 한나라 때 와서 인식된 그 부여라는 그 국호를 주나라 시대로 소급 적용을 했다는 거예요. 부여 자체의 고유 문자나 기록이 없어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는 거죠. 또 부여의 유적이라는 것도 막 송화강 유역이나 길림성 일대 이른바 서단산 문화에서 발굴은 되었는데 그래서 토성 방어 시설 대형 취락 청동기와 철기 혼합 유물 등이 막 발굴되기는 했지만은 그 궁전이나 명확한 행정 시설이나 계층화된 그 묘제처럼 막 국가 수준의 무엇을 보여주는 증거로는 부족하다는 거예요.
45:22
Speaker A
하지만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있지도 않았던 송화강 유역에서 부여의 궁전이나 국가 단위의 유적을 찾으면 그게 나오겠느냐고. 사료를 소급 적용해서 믿을 수 없다지만 그럼 부여의 소재지를 송화강 유역으로 보는 근거는 무엇이냐고. 그렇게 딱 고집어 꼬집어 못 박은 사료가 있느냐고.
46:41
Speaker A
사실은 없어요. 부여의 송화강 유역설도 직접 기록이 아니고 거리나 방향을 계산한 추정의 결과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 계산의 바탕이 되는 사료도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부여는 현도군에서 1천리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는 삼국지의 기사 한 줄 뿐이에요.
47:22
Speaker A
주류 학설이 주장하는 현도군의 위치는 역으로 송화강에서 1천리 서쪽인데 거기는 혼화 유역이고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주류 학설이 주장하는 사료적 근거라는 것이 소급 적용을 해서 믿을 수가 없다는 바로 그 삼국지 아니었나요?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3세기에 쓰여진 삼국지가 어떻게 기원전 부여의 건국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까? 명백한 자가당착이에요.
48:31
Speaker A
그렇다면 부여의 지명들은 왜 동쪽 만주로 옮겨져 있는 걸까요?
48:44
Speaker A
그 비밀은 명나라에 있습니다.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그 명나라는 그 북방 방어선을 강화하며 지명들을 대거 그 동쪽으로 이동을 시켰어요.
49:12
Speaker A
당태종이 고구려를 말살하기 위해 사료를 왜곡했던 휘패과승의 역사가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지명의 이동과 지도의 조작으로 완성이 되었던 거예요. 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거주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약해지고 흩어져 서쪽으로 옮겨 연나라에 가까워졌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11세기 자치통감이 말하는 길림 녹산설 역시 백제가 고구려를 건너뛰어 만주의 길림까지 공격했다는 지리적 모순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어요.
50:35
Speaker A
자, 이제 편견의 안개를 걷어내고 다시 삼국지를 펼쳐 볼까요?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고 현도군에서 1천리 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 현도군의 중심인 북경에서 북쪽으로 천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타나는 땅. 그곳은 만주 벌판이나 살림이 아니라 내몽골의 심장인 실린골 초원. 한자로는 석림곽록 초원입니다.
51:52
Speaker A
몽골어로 고원의 강을 뜻한다는 실린골로 내몽골 실린골은 내몽골 자치구의 중부에 위치하죠. 여기는 남쪽으로는 하북성과 맞닿아 있어요. 후한서 부여조에 보면은 부여국은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고 있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당시 선비족의 주 활동 무대가 내몽골 그 고원이었음을 감안하면은 부여가 만주 길림에 있는 것보다는 내몽골 실린골에 위치한 것이 아귀가 맞습니다.
52:36
Speaker A
또 위서 물길전에 보면은 물길국은 화룡에서 북쪽으로 가 큰산을 넘으면 부여국이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그 화룡은 만주의 그 조양을 가리킵니다. 조양시에서 북쪽으로 큰산을 넘는다는 것은 하북성과 내몽골을 가로지르는 대흥안령산맥이나 연산산맥의 끝자락을 넘는다는 뜻이에요. 북쪽으로 큰산을 넘으면 바로 부여다. 라는 그 기록은 부여가 요소 북쪽에 내몽골 초원에 바로 붙어 있었음을 시사하는 거죠.
53:48
Speaker A
그 내몽골 초원이 실린골 몽골어로 실린골 곧 한자로는 석림곽록인 거죠. 이러 보면 부여의 건국 신화에서 동명이 바이칼 호수에서 남아할 때 만났다는 그 엄표수는 내몽골의 해를렌강이었으나 또는 케를렌 강이었으며 그의 발길이 멈춘 그 축복받은 땅이 바로 이곳 실린골 초원이었어요. 초원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면은 그 땅은 오곡을 기르기에 적당하지만 다섯 가지 과일은 나지 않는다. 땅은 평탄하고 습지가 많으나 동이의 영역 가운데 가장 평탄하고 넓게 트여 있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55:38
Speaker A
쌀, 보리, 조, 콩, 기장 등을 기르기에 그 적당하지만은 복숭아, 자두, 살구, 대추, 밤 등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거는 기후가 다소 추운 지역임을 시사하는 걸로 내몽골 고원의 기후 특성과도 잘 그 들어맞습니다. 특히 지형이 그 평탄하고 습지가 많다고 묘사한 대목은 실린골 초원의 광활한 지형과 매우 흡사해요.
57:01
Speaker A
이곳은 북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때 만나는 그 첫 번째 거대 초원 지대로 현도군에서 1천리가 떨어져 있다는 삼국지의 기록에 가장 부합하는 지역이에요. 초원 지대임에도 막 강을 끼고 고리죠. 강을 끼고 농경이 가능한 지역이 많았다는 점은 부여가 유목과 농경을 병행했던 국가였음을 뒷받침합니다. 실린골 초원 지대. 거기가 부여의 중심지였고 그 세력이 장자구와 북경 일대까지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58:36
Speaker A
자, 이제 우리는 한반도와 만주라는 좁은 틀을 깨야 합니다. 부여의 진짜 무대는 북경 북쪽에서 내몽골 초원까지 뻗어 나갔던 거대한 대륙이었음을 오늘 이 사료들이 증명하고 있는 거예요.
59:50
Speaker B
지도가 넓어질 때 우리의 미래도 넓어진다.
59:53
Speaker A
여러분, 오늘 우리는 수천 년 전에 먼지 쌓인 그 사료와 병참학이란 냉철한 그 수치를 맞대어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묻습니다. 영토가 압록강 근처면 어떻고 송화강 근처면 어떠냐? 또 대륙 깊숙한 곳이면 뭐가 다르냐? 라고.
60:45
Speaker A
하지만 이건 단순한 땅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담아온 역사의 그릇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반도라는 좁은 틀 속에 고구려의 기상을 가두고 백만 대군이 험준한 지대를 거쳐 고구려까지 왔다는 불가능한 서사를 그 정설로 믿어 왔어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확인한 군사학적 이성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장안에서 평양까지 2,000km에 달하는 그 수레 행렬. 그 무한루프의 모순은 결코 압록강 변에서는 풀리지를 않습니다. 북경 인근의 현도군에서 북으로 천리. 내몽골의 광활한 실린골 평원. 그곳은 유목의 기동력과 농경의 풍요로움이 만나는 약속의 땅이었어요.
62:21
Speaker A
바이칼에서 남아한 동명이 엄표수 곧 해를렌 강을 건너 도착했을 그 푸른 초원이 바로 부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쪽 중원의 심장부와 맞닿은 곳에 고구려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수나라의 백만 대군과 당나라의 보급로가 비로소 합리적인 역사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64:00
Speaker A
존경하는 시청자 여러분,
64:10
Speaker A
역사는
64:13
Speaker A
이정표입니다.
64:16
Speaker A
우리가 역사의 강력을 좁게 비정하는 순간 우리 아이들의 상상력 또한 그 좁은 틀 안에 갇히고 말아요. 반면 잃어버린 대륙의 지평을 회복할 때 우리의 정신은 비로소 한반도를 넘어 유라시아의 광활한 평원으로 뻗어 나갈 수가 있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나눈 이 이야기는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철저히 기록에 근거하고 전략적 타당성에 바탕을 둔 진실로의 회귀예요.
65:21
Speaker A
이제 여러분의 지도 위에서 압록강이라는 그 선을 지우세요. 그 넘어 끝없이 펼쳐진 실린골의 초원과 대륙의 대지를 바라보세요. 그곳에 우리 선조들의 말발굽 소리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65:48
Speaker A
우리 역사는 우리가 믿는 만큼 넓어지는 거예요.
65:53
Speaker A
오늘 여러분의 가슴 속에 한반도를 넘어선 새로운 지도가 그려졌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기상을 이어받은 고구려의 진짜 강력을 찾아 떠나겠습니다. 지금까지 장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67:19
Speake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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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5
Speake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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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0
Speaker B
한자 강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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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quently Asked Questions

부여의 실제 강역은 어디였나요?

기존 학설은 부여를 송화강 유역이나 압록강 주변으로 보았으나, 고려 시대 학자 이승휴와 다양한 사료 분석에 따르면 부여의 강역은 요하 유역과 내몽골 초원 지대 등 훨씬 서쪽과 북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수나라 113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나요?

수나라 대군의 군량과 행군 거리, 수레와 우마의 수송 한계를 고려할 때 113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까지 진격했다는 기록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실제 진격지는 장안에서 2~3주 행군 거리 내 다른 지역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부여는 단순 부족국가였나요?

아니요. 부여는 상나라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은나라 때 영고 제례를 행하는 등 상나라 문화권과 연결된 장구한 제국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순 부족국가로 축소하는 주류 학설에 의문이 제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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